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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왕권을 능가했던 서인당이 야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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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thor oreo Date 25-05-08 14:39 Views 34 Times Comments 0 The thing 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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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왕권을 능가했던 서인당이 야당이 된 까닭정권이 사법적 판단에 의해 뒤집힌 역사적 사건이 있다. 대법원장 권한도 함께 행사했던 조선시대 군주의 판례 변경에 의해 51년 만의 정권교체가 일어난 일이 있다. 군주가 최고 법관의 권한을 활용해 정권을 전복한 1674년의 제2차 예송논쟁이 바로 그 사례다.1623년에 광해군과 북인당 정권이 몰락하고 인조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인당(남인·북인)의 경쟁자인 서인당(노론·소론)이 집권했다. 한양과 경기·충청권 지주들의 지지를 받은 서인당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부터 2년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이듬해까지 집권한 경험이 있었다.이렇게 집권 경험이 짧았던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뒤 51년간 장기 집권했다. 이 시기 보수 정치권의 구심점은 우암 송시열이다. 이 51년 기간의 후반부인 1659년에 벌어진 사건이 제1차 예송논쟁이다.왕도 어찌할 수 없었던 송시열의 권력 ▲ 2014년 '호서명현 초상화 특별전'에 소개된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연합뉴스이 사건은 중앙군 확충과 북벌정책을 놓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효종 임금이 그해 6월 23일(음력 5.4) 마흔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촉발됐다. 효종의 새어머니인 35세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죽은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3년복을 입어야 한다',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립이 이로써 발생했다.논쟁의 물꼬를 튼 남인당의 윤휴는 당나라 학자 가공언의 <의례의소>를 내세웠다. 예법 해설서인 이 책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정실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을 세워 장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라고 말한다. 효종이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를 뒤이어 장자가 되고 왕위를 이었으므로 장자인 효종을 잃은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게 윤휴의 주장이다.효종의 중앙군 확충과 북벌 의지를 반대했던 서인당 영수 송시열은 효종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장자가 죽더라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예외를 <의례의소>에서 찾고자 했다. 이 책은 '아버지를 계승(體)하기는 했지만(而) 적통이 아닌(不正) 아들이 죽으면 그 아들을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라며 예외를 인정한다. 송시열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의 논리를 이용해 '효종이 인조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통이 아니므로 자의대비는 1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송시열의 말은 거짓이었다. 효종은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통이었다. 체이부정의 부정(不正)은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자녀를 지칭했다. 효종은 후궁의 아들이 아니므로 '[정권교체의 명장면들] 왕권을 능가했던 서인당이 야당이 된 까닭정권이 사법적 판단에 의해 뒤집힌 역사적 사건이 있다. 대법원장 권한도 함께 행사했던 조선시대 군주의 판례 변경에 의해 51년 만의 정권교체가 일어난 일이 있다. 군주가 최고 법관의 권한을 활용해 정권을 전복한 1674년의 제2차 예송논쟁이 바로 그 사례다.1623년에 광해군과 북인당 정권이 몰락하고 인조정권이 들어서면서 동인당(남인·북인)의 경쟁자인 서인당(노론·소론)이 집권했다. 한양과 경기·충청권 지주들의 지지를 받은 서인당은 임진왜란 3년 전인 1589년부터 2년간,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부터 이듬해까지 집권한 경험이 있었다.이렇게 집권 경험이 짧았던 서인들은 광해군을 몰아낸 뒤 51년간 장기 집권했다. 이 시기 보수 정치권의 구심점은 우암 송시열이다. 이 51년 기간의 후반부인 1659년에 벌어진 사건이 제1차 예송논쟁이다.왕도 어찌할 수 없었던 송시열의 권력 ▲ 2014년 '호서명현 초상화 특별전'에 소개된 우암 송시열 선생 초상화.ⓒ 연합뉴스이 사건은 중앙군 확충과 북벌정책을 놓고 송시열과 대립하던 효종 임금이 그해 6월 23일(음력 5.4) 마흔 살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촉발됐다. 효종의 새어머니인 35세의 자의대비(장렬왕후)가 죽은 효종을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놓고 '3년복을 입어야 한다', '1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대립이 이로써 발생했다.논쟁의 물꼬를 튼 남인당의 윤휴는 당나라 학자 가공언의 <의례의소>를 내세웠다. 예법 해설서인 이 책은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정실부인이 낳은 둘째 아들을 세워 장자라는 이름을 붙인다"라고 말한다. 효종이 인조의 장자인 소현세자를 뒤이어 장자가 되고 왕위를 이었으므로 장자인 효종을 잃은 자의대비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게 윤휴의 주장이다.효종의 중앙군 확충과 북벌 의지를 반대했던 서인당 영수 송시열은 효종을 폄하하는 데 주력했다. 그는 장자가 죽더라도 부모가 3년복을 입지 않는 예외를 <의례의소>에서 찾고자 했다. 이 책은 '아버지를 계승(體)하기는 했지만(而) 적통이 아닌(不正) 아들이 죽으면 그 아들을 위해서는 3년복을 입지 않는다'라며 예외를 인정한다. 송시열은 체이부정(體而不正)의 논리를 이용해 '효종이 인조를 계승하기는 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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